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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연천 독립운동의 역사와 기록

기획특집/ 3.1운동 100주년

2019년 02월 28일 19시 17분 동두천연천시사신문


그들 모두는 불꽃이었고 모두가 뜨겁게 피었다가 졌다

영광스럽고 화려한 날들만 역사로 기록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종영한 TV드라마 ‘미스터 션샤인’(TVN)은 1900년대 초반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기 직전의 조선이 배경으로 우리 역사에서 아프디아픈 시기다. 드라마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일본군 장교가 내뱉은 대사 일부분이 기자의 뇌리에 박혀 오래도록 머물고 있다.

“조선은 왜란, 호란을 겪으면서도 아직 살아남았어요. 그 이유가 뭔지 알아요? 그 때마다 나라를 구하겠다고 목숨을 내놓죠. 누가? 민초들이. 임진년에 의병이었던 자의 자식들은 을미년에 의병이 되지요. 을미년에 의병이었던 자의 자식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의병은 반드시 화가 돼. 조선의 민족성이 그래. 조선인들은 목숨을 내놓고 달려들어. 자, 그럼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정신! 조선의 정신을 훼손해야지. 민족성을 말살해야 한다고.”

드라마에서 그려낸 시대는 3.1운동이 일어난 시점(1919년)보다 10여 년 정도 이른 경술국치(1910년) 즈음이지만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이 촉발시킨 항일 의병항쟁은 일제강점기 초부터 전개됐다. 아무런 힘이 없는 왕, 매국에 혈안이 된 고관대작들과 대척점에서 나라를 지키려 애쓴 이들은 무명(無名)으로 기록된 농민, 상인, 학생 등 평범한 민초들이라는 걸 그려내는 격변의 시대 속 처연함이 담긴 대사다.

그랬다. 우리의 역사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어김없이 들불처럼 번져 일어나 저항했던, 사실상 역사의 주인은 예나 지금이나 민초로 대변되는 소시민인 것이다.

올해로 3.1운동과 임시정부를 수립한지 꼭 100주년이 된다. 현실감 없이 머나먼 선조들의 이야기 같지만 불과 100년 전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을 잃은 많은 이들이 지켜낸 그들의 소중한 조국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우리들의 조국임을 가끔은 기억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잊고 산다.

본지는 3.1운동,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동두천과 연천지역에서 3.1만세운동으로, 의병으로 일제와 맞선 선조들의 궤적을 더듬어 봤다. 역사책이나 위인전에서 보고 들은 유명한 위인이 아닌, 동네의 농민이고, 상인이며, 학생이기도 했던 우리 동네의 만세운동 흔적과 의병의 활동들을 몇몇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질 것도 알고, 오래 못 버틸 것도 알았지만 담대히 맞서 싸웠던 그들은 희미한 기록 속에서 선명히 모습을 드러내며 얘기했다. 우리가 여기 있었다고, 두려웠으나 목청껏 외치고, 끝까지 싸웠으며 그렇게 불꽃처럼 환하게 뜨거웠다가 졌다고.



1919년 3월 중순부터 운동

동두천·연천 지역의 3.1 만세운동 기록은 원전자료나 당시 상황을 정확히 나타낸 재판, 수사기록, 보도자료, 수기자료가 부족하고 각 인물의 행적 확인이 제한되는 부분이 많았다.
이에 수년간 당시 현장목격자의 증언, 지자체 역사편찬 활동 등으로 지역의 3.1만세운동과 의병활동의 뿌리를 조사·연구해온 ‘동두천향토문화연구소’(소장 이명수)와 ‘연천문화원’(원장 이준용)의 도움을 받아 상당한 근거와 사실성을 갖춘 사료들로 기사의 뼈대를 세웠음을 미리 밝힌다.

수개월 동안 지속됐던 1919년 3·1운동의 전개 과정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점화기)에서는 서울을 비롯해 평양·진남포·안주·의주·원산 등의 주요 도시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면서 그 시작을 알렸다. 이 시기에는 비폭력 투쟁이 특징으로 민족대표와 학생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3월 10일을 전후로 한 2단계(도시 확산기)운동은 전국 주요 도시들로 확산돼 상인과 노동자들도 철시와 파업으로 적극 참여했다. 3월 중순 이후의 3단계(농촌 확산기)에는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만세운동이 확산됐다. 바로 이 시기가 동두천과 연천에서도 만세운동이 활발해진 시점이다.

농민들이 적극 참여하며 만세운동의 규모도 커졌고 양상도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해 면사무소와 일본 헌병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무력투쟁으로 변했다. 농촌 확산기 만세운동은 주로 장날에 일어났는데, 주동자들은 각 마을로 통문을 돌리거나 전단을 살포해 계획을 미리 알렸다.

장을 돌아다니는 행상들은 각지에서 벌어지는 만세운동 경험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의병투쟁이 활발했던 지역에서는 산상봉화시위나 횃불시위가 전개됐고, 며칠씩 무리지어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에 참가하는 ‘만세꾼’이 등장하기도 했다.



동두천-3월 26일 학생·청년 주도


동두천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6일 장날에 동두천시장(현 미2사단 골프장 부근)에서 일어났다. 만세운동은 학생과 청년들이 주도했는데 배재학당 학생인 ‘정원이’가 서울과의 연락을 맡고 청년층 지도자인 ‘한원택’, ‘박창배’를 중심으로 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한 후 마을별 책임자를 선정했다.

거사일도 동두천 장날인 3월 26일로 정하는 등 많은 군중을 동원하려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송내 ▲지행 ▲좌기골 ▲기촌 ▲빈양말 ▲하봉암 ▲상봉암 ▲창말 ▲싸리말 ▲안흥리의 10여 개 마을주민 1300여 명은 가슴에 태극기를 품은 채 예정된 시간에 동두천시장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하지만 젊은 청년과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터라 선두에서 구심점 역할을 할 리더가 없어 우왕좌왕했다. 이때 군중 속에 있던 ‘홍덕문’이 앞으로 나서며 “내가 선봉에서 지휘하겠으니 여러분은 나를 따르라”고 외치면서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복창하며 홍덕문의 뒤를 따랐다.

군중들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면사무소로 직행, 이담면장 ‘신공우’를 끌어내고 함께 만세를 부를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신공우’는 어쩔 수 없이 함께 만세 삼창을 했고 선두에 선 홍덕문과 함께 군중을 이끌어 나갔다. 군중은 면내 윗장거리(미2사단)와 아랫장거리(동두천역)를 지나면서 그 수가 점차 불어났고 힘찬 함성으로 분명한 독립 의지를 나타냈다.

만세운동이 확산되며 면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헌병분견대는 자체진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양주 주내에 있던 본대에 증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곧이어 도착한 일본 기마헌병들은 총과 칼로 무장한 채 군중들을 기다렸고 만세를 부르며 다가오는 군중들을 마주하자 무차별 공격을 자행했다.

기마헌병들과 맞부딪힌 순간부터 동두천역 앞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선두에 서있던 홍덕문, 정원이, 한원택 등은 헌병들이 휘두른 발길질과 총개머리에 맞아 하나 둘 스러져갔다. 군중들의 옷은 찢겨나가고 갓끈은 끊어졌으며 온 사방이 붉은 피로 물들어 가는 동시에 소요산은 처절한 울부짖음을 구슬픈 메아리로 돌려보냈다.

제대로 된 무기를 갖추지 못한 군중들의 작은 반격은 일본 헌병들의 두세 배의 잔혹한 무력사용을 부추겼다. 결국 홍덕문 등 주동자들이 체포되며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면서도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니 일본헌병들은 당황했고 이를 회유하려고도 했지만 그들은 아랑곳 않고 더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옥중의 홍덕문은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 내가 전부 지시한 일이니 젊은 사람들은 모두 풀어주라”며 거사의 모든 책임을 자청했다. 이날 시위로 정원이, 한원택, 박창배, 박경필 등은 태장(매로 치다)을 맞고 풀려났으며 홍덕문은 6개월 형을 받고 복역했다.

형기를 마친 홍덕문은 고향에 돌아왔으나 갖은 고문에 의한 형독으로 고생하다 수년 후 사망했다. 1975년 동두천노인지회에서 독립유공자추모회를 결성, 시민들의 성금으로 소요산 초입(상봉암동 131)에 애국지사 홍덕문 추모비를 세웠고, 1986년 4월 28일 동두천시의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돼 관리 중이다. 그 뒤 1991년에는 독립유공자추모회와 애향동지회가 추모비 옆에 추모비각을 세워 그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연천-5회 격렬 운동, 농민 주도


연천의 만세운동은 동두천보다 닷새 빠른 1919년 3월 21일 백학면 두일리 장날에 전개됐다. 만세운동은 농민이 주도해 계획하고 추진했는데 당시 미산면 석장리에 거주 중인 농민 ‘조우식’(당시 46세)은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3.1만세운동을 연천에서도 확산시키려 왕징면 동중리에 거주하던 청년 ‘정현수’(당시 21세)를 비롯한 여러 동지들과 의기투합, 장날에 맞춰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모의했다.

3월 21일 파장 무렵인 오후 6시 조우식이 시장에 모인 군중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기 시작했고 날품팔이를 하던 ‘구금룡’이 소방용 경종을 치며 분위기를 고조시켜 군중이 모여들도록 유도했다.

정현수는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리면서 만세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장년의 조우식과 청년 정현수가 앞장서 리드하자 순식간에 150여 명의 군중이 모였고 조우식이 친일 면장도 만세운동에 동참시킬 것을 주장하자 정현수가 민가에 숨어있던 백학면장을 찾아와 같이 만세를 부르도록 했다.

이때 만세운동을 저지하려 일본헌병들이 출동했지만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백학면사무소에 진입, 면사무소 직원들에게도 만세를 부르도록 종용했다. 직원들이 동참하지 않자 격양된 군중들이 면사무소 유리창과 집기를 부수는 등 만세운동의 양상이 격렬해졌다.



밤 10시경 만세운동 군중이 200여 명으로 증가하자 조우식과 정현수 등은 미산면 마전리 관아로 이동을 제안,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치며 거침없이 행진했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백학면 통구리의 ‘백천기’는 60여 명의 사람들을 모아 마전리 헌병주재소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고 두일리에서 출발한 군중 200여 명과 통구리에 출발한 60여 명의 군중들이 마전 향교에서 합류하기 이르렀다.

이들은 향교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세워 놓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큰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들이 석장리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할 때 일본 헌병들의 기습진압으로 대부분의 주도자가 체포된다. 조우식 징역 3년, 정현수 징역 2년, 구금룡·이낙주·홍순겸·한상혁·김문유는 징역 각 1년 6개월, 김복동 징역 1년, 백천기 징역 8개월이 구형됐다.

하지만 이날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31일 장파리 횃불시위와 4월 1일 삼곶리에 모인 400여 군중이 연천읍내로 행진했고, 삼율리에서만 두 차례(1일, 10일) 만세운동이 추가 전개됨으로써 연천군의 총 체포·구금인원은 95명에 달했다.

21일 만세운동으로 1년 6개월 형을 구형받은 구금룡은 항소를 했으나 기각, 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으며 국가는 조우식과 구금룡을 포함한 7명의 공훈을 인정, 건국훈장 애족장과 대통령표창을 각각 수여했다. 한편, 연천군은 2008년 백학면(372-1번지)에 두일리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을 건립하고 매년 기념행사(3월 21일)를 열어 지역의 독립운동역사와 발자취를 재조명하고 있다.



독립군의 모체가 된 의병


전국적으로 전개된 의병항쟁은 크게 1895년의 을미의병, 1905년의 을사의병, 1907년의 정미의병의 3기로 구분된다.

을미의병은 조선 말 최초의 대규모 항일 의병으로 명성황후 시해, 단발령(1895년)으로 촉발됐다. 지방의 저명한 유학자를 의병장으로 의병들이 구성됐고 친일부역자 응징 및 처단, 진압을 하는 관군이나 일본군에 대항, 군용시설과 주둔지 공격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을사의병은 을사조약 강제체결(1905년)을 계기로 시작됐다. 을미의병의 해산 뒤 은거 중이던 의병장들이 각지에서 의병들을 재규합한 조직으로 조악한 무기, 훈련 부족 등으로 조직화된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했으나 점차 확대·발전돼 정미의병으로 이어진다.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칠조약 체결, 군대강제해산을 계기로 일어난 전국적·조직적 항일무력전으로 1907년~19010년 사이 지속됐고 군대강제해산(1908년)이 도화선이 돼 최고조에 달했다. 정미의병은 참여계층이 다양해지며 전면항일전의 성격을 띄었고 무기, 편제의 정예화로 전력이 크게 향상됐다.

소규모화, 다원화되면서 산간지대를 근거로 효과적인 유격전이 가능해졌으나 1909년 일본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점차 그 기세가 꺾여 국내활동이 어렵게 된 이후에는 만주로 근거지를 옮긴 의병과 합세, 항일 독립군의 모체가 됐다.



동두천·연천 의병항쟁 ‘활활’


동두천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했던 시기는 1907년 이후부터 국권을 완전히 빼앗긴 1910년까지로 정미의병으로 볼 수 있다. 동두천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은찬, 윤인순, 연기우, 정용대, 김연성 등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300여 명 이상으로 추산되며 다양한 총기로 무장하고 산중(마차산, 소요산으로 추정)에 총기를 은닉, 평시에는 민간인으로 위장해 있다가 상황이 발생하면 무력투쟁에 임했다.

또한 동두천은 지리적으로 양주와 포천을 잇는 의병들의 산중 연락통로로 이용되며 많은 의병들이 동두천을 거쳐 이동하면서 전투를 벌였다
연천의 의병은 을미의병부터 정미의병까지 꾸준히 명맥을 유지했다.

유생출신으로 의병조직 초기부터 의병장으로 활동한 ‘왕산 허위’는 1896년부터 1908년 일본헌병에 구속될 때까지 12년 동안 여러 차례 격렬한 의병항쟁을 벌였는데 특히, 후기 의병시기에 연천을 근거지로 각지의 의병부대와 연합(4~5000명 규모)해 서울진공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연천출신의 유일한 의병장인 ‘심상우’ 의병장은 허위의 의병모집 격문을 보고 자진 입대, 분견대장으로 일본헌병대와 경찰 주재소 등을 유격전 방식으로 습격하며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며 연천을 중심으로 활동한 권득수, 전복규, 진성교 등이 항일 투쟁에 힘을 보태며 크고 작은 전과를 올렸다.

정미의병은 공통적으로 조직 초기에는 지역을 장악하고, 일본의 통치기관을 습격했던 양상이었으나 말기에는 군자금 조달을 위한 재물강탈, 요인납치, 산중을 지속 이동하며 생존을 위한 보급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민가에 피해를 입히며 쇠퇴한다.

바로 이 부분이 의병을 폭도나 비적으로 규정하고 강도, 강탈 등의 죄목을 덧씌워 범법행위만 부각하고 있는 게 일본의 관점이었다. 그들의 의병재판기록에서도 강도, 물품강탈이 주목을 받는 등 의병들의 정당한 구국활동이 범법으로 해석돼 지금까지 폄하되고 있는 것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이 남긴 의병토벌, 체포 재판기록으로 확인 가능한 지역출생 의병명단은 현재까지 동두천 18명, 연천 9명에 불과하다. 취재·자료 확인 과정에 도움을 준 이명수 동두천향토문화연구소장은 “개인, 지역 향토사학자들의 노력만으로 아직 드러나지 않았거나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고 독립운동·의병활동에 자신의 생을 바친 선조들의 기록을 찾는데 많은 제한이 있다.

정부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면밀한 기록검토, 아직 이름을 찾지 못한 수많은 유공자를 발굴하려는 움직임과 더불어 그 후손들에게 합당한 예우를 다하려는 정부의 의지가 절실하다”고 일침을 가했다.



정호영 기자 | 다른기사보기 | ultra04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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