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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부흥기 이끈 동두천의 다양한 스펙트럼

Rock·食·Fashion·희귀템… 제2의 르네상스 꽃 피울 동두천

2019년 03월 14일 17시 00분 동두천연천시사신문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은 많은 것을 앗아갔고 힘겹게 살아남은 이들은 이를 악물며 생을 버텨내야했다. ‘안보’라는 이름 아래 미군이 본격 주둔하기 시작한 1955년 이후 총인구 3000여 명이던 작은 마을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국전쟁 직후 국내 주둔 미군, 통칭 미8군의 수는 32만 명이 넘었고 그 규모가 가장 컸던 곳이 바로 여기 동두천이었다. 자연스레 술집과 유흥가가 들어섰고 주둔 군인들과 주민들은 달러나 군표를 주고받으며 원하는 것을 거래했다. 군인들은 부대에서 반출한 전쟁 물자를, 주민들은 미군들이 요구하는 서비스와 오락거리를 제공했다. 원하지 않았지만 살기 위해 받아들인 요상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마른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도시를 재빠르게 변화시켰다.

미군들의 큰 키만큼 남다른 씀씀이 덕에 여유로운 지역이기도 했다. 사방에는 영어간판, 달러는 개가 물고 다닐 만큼 흔했고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거리에 많았다. 먹고, 입고, 듣고, 보는 모든 것이 풍족했던 시절도 있었으며 전국이 허덕이던 IMF시기도 무난히 넘겼다.

하지만 기지촌·양색시·슈샤인보이 등의 별칭들이 도시의 아이콘이 됐던 시간 동안 왜곡된 시선과 날카로운 말들에 기인한 상처는 돈으로 덮을 수 없었고 오랜 시간 주눅 들어야 했으며 편견 속에서 당당히 말하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귓가를 울리는 K-Rock 비트의 시작이, 세계를 씹어 먹고 있는 BTS의 멜로디와 퍼포먼스가, ‘한 번도 안 먹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는 부대찌개의 시초이며, 당시 패피들의 최신 트렌드를 이끌고, 희귀 아이템의 천국이던 곳이 바로 여기였다고.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 십년 유지되는 권세 없고 열흘 붉은 꽃은 없다)이라는 말처럼 계속될 것 같던 번성기(florescence)는 서서히 저물어 현재의 동두천은 찬란했던 영광을 시간 속에 가둔 채 활기 없이 무거운 공기만 감돈다.

금붙이나 그림, 불상만 문화재가 아니라 생생히 살아있는 우리 삶의 비늘들 모두가 문화재가 될 수 있다는 기대, 14~16세기 문화·예술·정치 등 사회전반에 새로운 시도, 다양한 실험이 확산됐던 유럽의 르네상스(Renaissance)운동을 떠올리며 본지는 동두천의 지난날들을 되짚었다.

기록 속 동두천은 이곳이 ▲한국 록의 발상지 ▲다양한 식(食)문화의 전초기지 ▲희귀템 가득한 보물창고였음을 선명히 드러냈고 이런 번성의 흔적과 경험, 충분한 장점을 기반으로 동두천 르네상스 운동을 치밀하게 기획하고 실행한다면 재도약의 기회는 분명히 다시 오리라는 기대감으로 기사의 밑그림을 그렸다.

사람이나 조직이나 진정한 내공은 위기 때 발현되기 마련이다. 동두천의 진정한 내공은 정부·지자체의 적극적 지원과 시민들의 공감·동참이 접점을 이루는 순간 진가를 나타내기 시작할 것이며 아마 그 지점부터 동두천 르네상스가 꽃을 피우기 시작할 것이라는 희망과 확신을 가득 담아 응원을 시작한다.



대중음악 변혁의 심장부


미8군 군인들을 위한 위문공연 무대는 한국 대중음악 변혁의 기폭제가 됐다. 초기에는 미 본토의 최고 스타였던 ‘엘비스 프레슬리’, ‘마릴린 먼로’, ‘냇 킹콜’ 등이 내한공연을 펼쳤지만 본토 스타들만으로 엄청난 공연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미8군 공연관계자들은 한국의 음악인들을 무대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미국 대중음악 전파와 한국대중음악 발전의 바탕이 된 ‘미8군 쇼’의 시작이었다.

전쟁 이후 모든 것이 궁핍한 상황에서 음악으로 돈을 벌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기회였다. 당시 버스요금이 8원, 자장면 한 그릇 25원, 쌀 한가마 가격이 3000원 정도인데 비해 미 8군 무대 음악인들의 출연료가 3000원~2만 원 정도였다고 하니 많은 음악인들이 ‘동두천 드림’을 꿈꾸며 속속 모여들었다.

당시 미군이 한국 공연단에 지불한 금액은 120만 달러로 국내 연간 수출액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하니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음악인으로서 자신의 음악을 선보일 수는 없었다.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이었기에 미군의 취향대로 공연해야 했고 음악인들은 살기 위해 스스로 미국의 유명스타들을 복제에 가깝게 모방해 노래하고 연주했다. 비슷할수록 인기는 높았다.

게다가 미8군 위문공연 무대는 누구나 허락되는 무대가 아니었다. 3~6개월 주기로 요즘의 슈스케, 프로듀스 101 같은 엄격한 오디션을 통과해야 했고 결과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며 등급에 따라 출연료가 정해지기에 최대한 원어민에 가까운 팝을 부르고 연주하려 수십 번, 수백 번씩 같은 노래를 처절하게 연습했다.

당시에도 체계적인 교육과 관리를 하는 연예기획사가 적잖이 출현했으며 공연을 펼치는 클럽마다 선호하는 공연형태와 음악취향이 달랐기에 상황에 맞는 공연 순발력과 다양한 스타일을 소화할 수 있는 유연성, 미 본토의 최신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록 모방에서 시작했지만 다양한 장르의 서구음악을 접하고 체득한 덕에 트로트를 중심으로 이뤄지던 일반 대중가수들과 차별화된 노선을 걸었고 그 지점부터 한국의 대중음악은 한걸음 전진할 수 있는 추동력을 얻은 것으로 평가된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오디션을 거친 내공, 다양한 레퍼토리로 단련된 미8군 무대 출신 음악인들은 시선을 돌려 일반 무대로 진출한다. 일반인의 접근이 제한되는 미8군 무대와 달리 1961년 KBS-TV와 MBC라디오의 개국은 기존 가수들과 확실한 차별성, 장르적 다원화를 뽐낼 수있는 창구가 됐고 제한된 경로로 미국의 음악과 스타일을 접하던 대중들은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무대를 장악하는 미8군 출신 음악인들에게 점차 매료되기 시작한다.

최희준, 김희갑, 스탠더드 팝의 패티김과 밤안개의 현미 등이 큰 인기를 얻었으며 트위스트 춤과 재즈도 많은 사랑을 받기 시작한다. 1969년은 한국 대중음악의 분기점이 된 해다.

1964년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이후 안착한 트로트의 시대, 이미자의 독주 체제는 1969년을 기점으로 파격과 혁신을 보인 ‘록’에 의해 흔들렸고 젊은 세대는 열광적 지지를 보냈으며 그 중심에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이 있다. 오디션을 거쳐 1955년부터 미8군 무대에 섰던 신중현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완벽히 카피한 무대매너와 기타 테크닉으로 미군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지만 음악 창작욕을 기반으로 1958년 첫 기타 솔로앨범 ‘히키신’을 발표한다.

영국에서 ‘비틀즈’가 활동을 막 시작하던 1963년, 미8군 무대부터 함께한 멤버들과 밴드 ‘ADD4’를 결성한 그는 동두천에 연습실을 꾸리고 낮에는 작곡과 연습, 밤에는 클럽 공연을 하며 마침내 1964년 7월 한국 최초의 창작 록 앨범 ‘빗속의 여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시기 대중들의 눈높이보다 한 뼘 앞섰던 탓인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이어 결성한 다른 그룹들의 활동도 그리 신통치 못한 결과에 신중현은 낙담한다.

하지만 1968년 ‘펄시스터즈’의 데뷔앨범 프로듀싱을 하며 ADD4 데뷔앨범에 수록했던 ‘내 속을 태우는 구려’를 ‘커피 한잔’으로 리메이크 수록한 것이 대성공을 거둔 이후, ‘김추자의-님은 먼 곳에(1969년)’ ‘김정미-간다고 하지 마오(1971년)’ ‘신중현과 엽전들-미인(1973년)’ 등 제작하고 발표하는 곡들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가요계 ‘미다스의 손(Midas touch)으로’ 확고한 입지를 굳힌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으로 촉발된 유신정권의 대중문화 탄압은 미인을 비롯한 그의 음악 19곡을 금지곡으로 지정, 1980년 해금될 때까지 그의 음악은 암흑기를 보낸다.

국내 대중음악계에서 잊혔던 신중현의 음악은 1990년대 접어들며 많은 후배 음악인들에 의해 재조명됐고 1997년 5월 그를 위한 헌정공연에서 20년 여 만에 무대에 오르며 기나긴 암흑의 시간에도 한국 록의 대부는 여전히 건재함을 드러냈다.

이외에도 수많은 음악인들은 미8군 무대의 수준을 맞추기 위해 새로운 음악을 찾아듣고 변화된 공연을 시도했다. 관객과 함께 호흡한다는 개념도 이곳에서 체득했다. 이런 열정적 모방과 모방을 넘어서려는 치열한 노력이 오늘날 K-Rock·K-POP의 훌륭한 자양분이 됐으며 그들의 치열했던 음악인생의 중심에 늘 동두천이 있었다.



대체 불가능한 록(Rock) 페스티벌


수많은 음악인들이 미8군 무대에 오르기 위해 피·땀·눈물을 흘렸고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으며, 손이 부르트도록 연주하면서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곳이 동두천이다. 이렇게 오래도록 K-Rock의 DNA를 품고 있던 동두천에서 록(Rock) 페스티벌이 개최되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을 것이다.

1999년 9월 첫 개최 이래 매년 늦여름 즈음 개최되는 ‘동두천록페스티벌’(이하 동록페)은 국내 최장수 록페로 2008년 경기도 10대 축제에 첫 선정되며 롱런이 기대됐지만 열악한 재정여건, 부족한 관심 등 거듭되는 부침과 악영향 탓에 아직은 명성에 걸맞은 규모를 갖추지 못했다. 그래도 호황기였던 2010년대 초반까지는 빠듯했어도 적지 않은 예산규모와 꾸준한 후원에 힘입어 2~3일 동안 관람객이 2만 여명에서 최대 7만여 명까지 몰렸다.

중·소형 무대지만 최상급 음향장비, 뮤지션과 교감하는 현장 분위기, 다양한 기획전, 각종 편의시설 확충 등 조직위원회가 매해 고민하고 노력했음에도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국내·외 최정상급 뮤지션들을 연일 헤드라이너로 내세우는 매머드급 타 록페에 비하면 역부족이었던 것도 사실이며 동록페와 연계 가능한 지역관광 인프라 부족과 정통성을 고수하는 사이 최신 트렌드를 놓친 것도 동록페 침체에 상당 부분 기여했을 것이다.


어느 가수의 날선 비판처럼 국내 대중음악 시장의 최고 활황기였던 1990년대와 온라인 발전기였던 2000년대, 그리고 현재의 2010년대 들어 음악소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변한 것도 한몫했다. 1990년대는 소장, 2000년대는 저장, 2010년대는 소모. 마치 지금의 음악시장은 이동통신사의 하위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라는 그의 말처럼 2010년대 초반 이후 직면한 국내 음악시장 전반의 침체기는 아직 끝이 가늠되지 않는다.

하지만 동록페의 과감한 시도들은 록페의 정체성을 선명히 확립했고 국내 후발 주자들로 하여금 유사 페스티벌 문화의 도입과 정착에 분명한 영향을 끼쳤으며 첫 개최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전국의 학생들과 아마추어 록밴드의 등용문 역할을 하고 있는 점, 폭 넓은 관객참여를 위해 무료로 공연을 하는 점은 확실한 차별성을 보인다. 따지고 보면 2009년부터 우후죽순 방송된 모든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가 동록페인 것이며 그것이 동록페가 여전히 대체 불가능한 이유다.

올해 21회째를 맞게 될 동록페는 지난해 12월 2019년 경기관광대표축제로 재선정됐다. 취재 중 만난 동록페 조직위 관계자는 “올해는 기존의 큰 틀은 유지하되 록과 다양한 장르의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 공연규모의 확장 등 K-Rock 발상지라는 타이틀에 부합하는 다각적 기획으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예정이며 경기도 대표축제에 안주하지 않고 한 단계 더 발전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맛의 전초기지였던 노포들


오래된 음식에 대한 기억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맛과 힘을 지닌다. “한입 베어 물면 입안에 한 시대가 들어오는 듯한 식당들이 있다" (박찬일-노포의 장사법中)

이 셰프의 정의대로 라면 노포란, 세월과 함께 기록된 맛의 기억을 일컫는다. 흔히 오래된 식당을 일컬어 노포(老鋪)라 부른다. 마치 사람마냥 '옛 고(古)' 자 대신 '늙을 로(老)' 자를 붙이는 이유는 사람과 함께 나이 들며, 절로 깊은 맛을 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동두천은 60여 년 전부터 서구의 음식문화를 받아들이고 한국화(化) 했으며 타 지역에 전파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풍족했던 그 시절부터 30~60여 년째 한자리를 지키는 동두천의 여러 노포들도 역사와 추억을 품고 있는 만큼 경쟁력 충분한 깊은 맛과 뻔하지 않은 정취를 자랑하기에 TV프로그램에 종종 모습을 드러낸다.

생연동 부대찌개, 중앙로 평양냉면, 보산역사거리 치킨바비큐, 미 2사단 앞 경양식과 피자, 삼육사로 솥뚜껑, 생연로 생고기 등은 단골손님의 추억소환은 물론 프로먹방러들의 취향을 저격하며 한동안 문정성시를 이뤘고 지역의 이미지 제고를 견인했다. 또한 중앙역 앞 떡갈비, 보산동 치킨치즈라면과 케밥 등도 동두천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차별화된 맛과 분위기로 많은 이들을 여전히 유혹 중이다.



심쿵 유발, 희귀템 뿜뿜


요즈음은 온라인쇼핑의 발달로 클릭 몇 번이면 지구 반대편의 상품도 어렵지 않게 구매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오직 동두천에서만 구매가 가능했던 상품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60~1970년대는 미국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면서 좋은 품질을 자랑하던 동두천 맞춤양복이 ‘평생 3벌의 양복만 입는다’는 극 실용주의 미국인들의 ‘심쿵’을 유발, 주저 없이 지갑을 열게 만들었다.

인종도 다르고 체형도 달라 맞춤의류가 필요했던 그들에게 사진만 보여주면 어떤 스타일의 옷이던 만들어 내는 동두천의 양복디자이너들은 극찬을 받았으며 고국으로 돌아갈 시기가 다가오는 미군들은 양복을 몇 벌씩 맞추기도 했다.

미군들의 요구대로 옷을 제작하다보니 자연스레 모방중심으로 의류제작을 했지만 그 모방의 경험과 노력으로 뛰어넘은 기술이 시너지를 발휘하며 우리나라 의류트렌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검열이 엄격했던 1970~80년대는 많은 곡들이 종잡을 수 없는 잣대로 금지곡 낙인이 찍혔고 다수의 음반은 금지곡을 삭제한 후 발매했다.
그만큼 정상적인 루트로는 온전한 원판 그대로의 음반을 구하기 힘든 시기였으며 클래식 명곡 전집이나 레드제플린, 롤링스톤스, 딥퍼플에 열광하던 전국의 음악 마니아들은 온전한 LP원판을 구하려 혈안이었다.

2만 명이 넘는 미군이 주둔했던 그 시절 동두천은 미국문화를 가장 빨리, 검열의 칼날을 피하며 접할 수 있는 지역이었고 미군들에 의해 반출되는 물품들 중에는 이들이 원하는 원판이 있었으며 자연스레 음악 마니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하지만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가격의 폭등을 초래했다. 미군들이 반출한 음반의 원본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없어서 못 팔았으며 그 대안으로 조금은 조악했지만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수 있던 동두천의 ‘빽판’(불법복제음반)이 리스너들의 새로운 문화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오아시스 역할을 했다.



정호영 기자 | 다른기사보기 | ultra04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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